다음날 아침 우리는 호텔 조식뷔페를 갔다. 와우! 역시 호텔뷔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짙은 푸른색 벽과 어우러진 노란 냅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 하루를 든든히 하기 위해 갖가지 치즈와 빵 소시지 햄등을 정량초과로 입에 넣었다. 식사 후 엘리자베스와 그의 아들이 다시 호텔을 찾아왔다. 우리는 폐 끼치기 싫어 우리끼리 여행하려 했으나 제프가 굳이 그들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한 시간 정도 차로 이동한 것 같다.
우리는 Lancut Castle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 공원을 통과하여 커다란 맨션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대화가 잘 안돼 무조건 우리는 따라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입장료도 내고 들어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해 조금 기다렸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여행방식과 사뭇 달랐다. 우리는 직접 지도를 찾고 계획을 짜서 여행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그의 아들 '미하오'의 도움 없이는 이곳에 도착하는 것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이곳은 과거 귀족들이 살았던 장소로 1629년에 시작해 1642년에 완공하였다 한다. 몇몇 귀족집안이 이집에 거주했는 데 the Toporczyk family, Stadnicki family, 그리고 17세기부터 the Lubomirski family, 그리고 Potpcki family가 1944년까지 살았다 한다. the Stanislaw Lubomirski 가족이 살면서 1610년에 현대화시켰다고 한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우리가 들어갈 차례가 되어 관람이 시작되었다. 성안은 미로같이 여러개의 문과 통로가 있어 안내인을 따라다녀야 했다. 와우 왕이 사는 궁같이 크지는 않지만 예쁘게 단장한 방들과 복도는 과거의 귀족들이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공작부인 Izabela가 사교하고 모임 하는 방들은 너무나 탐날정도로 아름다웠다. 난 민트색 벽지와 멋진 소품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고 매우 탐났다. 지금의 벽지는 1944년 이자벨라의 증손자가 다시 실크벽지였던 것을 Lyon으로 바꿨다고 한다. 특이한 점하나는 폴란드는 비교적 겨울에 추워서 그런지 도자기로 된 벽난로들을 각각 방마다 갖고 있었다. 그 도자기 벽난로는 각각의 색깔과 디자인으로 갖추어져 있고 장식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자기는 열을 오래 품고 있으니까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는 하녀들이 식사준비를 위해 썼던 각종 식기류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복도의 아름다운 조각과 도자기등은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특히 공작부인 이자벨라는 예술적인 영감과 정열이 뛰어나서 그림, 조각, 장식품등 해외여행할 때마다 많이 사들였다고 한다. 터키식 아파트, Brenna 아파트,, 일층에 있는 차이나식 아파트, 연회장, 침실, 드레스룸, 그리고 살론 그리고 사계절을 보여주는 거울방등 그녀가 1816년 죽을 때까지 수십 년간 이어졌다한다.
정원으로 나오니 엘리자베스와 그의 아들은 우리를 마차와 말장식품을 전시하는 건물로 우리를 인도했다. 건물 현관 로비에 사냥해서 잡은 야생동물들의 표본을 사방에 걸어두었고 여러개의 전시실에 갖가지 마차들이 갖가지의 형태와 크기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난 마차가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로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고작 영화에서 보던 마차가 고작인데 정말로 다양한 기능과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또한 안장과 장식품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난 그들의 생활이 어땠는지 짐작이 갔다. 난 지금 세상에 태어난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보나 마나 귀족으로 태어날 일은 가능성이 낮을 테고 그나마 지금은 부유한이와 평민인 나의 차이가 좀 겉으로나마 덜 드러난다고나 할까?
다시 정원을 거쳐 우리는 식물원같은 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자베스도 학교여행에서 오고는 처음이란다. 참고로 이정원은 약 36헥타르 정도로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에 영국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작부인 이자벨라가 특히 꽃을 좋아해 오렌지나무와 많은 꽃들을 심었다 한다. 이정원은 세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온실 안으로 들어서니 갖가지 난과 아름다운 꽃들이 어여쁨을 자랑하고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각 지역마다 입장료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휴, 식물원은 안 가도 되었는 데....
이 세상의 삶은 참으로 다양하다. 한평생을 좋은 옷과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사람과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는 사람들.... 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무어라 표현해야 하는 가?
그날 저녁 우리는 시동생과 엘리자베스와 광장에 있는 폴란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시동생은 전날보다 감기가 많이 나아진것같아 다행이었다. 비록 긴 시간을 시동생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난 그가 폴란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남편은 하나뿐인 동생과 헤어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내가 한국에서 가족과 헤어질 때처럼..... 어쩌랴! 우리가 택한 인생이니 이런 결과도 달게 받아야지. 우리 인생은 헤어짐과 만남의 반복이다. 미국인들은 이 감정에 한국인보다 익숙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영토가 넓어 다른 주에 사는 가족은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본다. 하지만 난 모든 가족이 서울에 가깝게 살아 자주 보았었다. 그래서 헤어질 때 마음은 남다르다. 우리는 다시 다음날 크라코우로 돌아가야 한다. 디트로이트로 가는 비행기가 오전 6시 5분에 크라코우에서 떠나니까....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제프와 나누고 조만간 미시간을 방문하고 건강 잘 챙기라는 말만 한채 우리는 호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