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 History Museum in New Baltimore, Michigan!
6월 10일 남편과 나는 집에서 30분 정도 동쪽으로 운전해서 New Boltimore Park에 갔다. 이작은 도시는 St. Clair라 불리는 큰 호수의 북쪽의 Anchor Bay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작은 오래된 소도시다. 근처의 Radio Control Air Show를 보러 갔다가 거기서 가까운 이곳을 들렸다.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비치로 나와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Baltimore란도시는 Maryland주에 위치한 것만 알았는 데 미국이 넓은 탓에 도로이름이나 지명이 너무 겹치는 게 많아서 혼동을 일으킨다. 한 예로 미시간주 위쪽의 한도시 이름은 Bad Axe( 나쁜 도끼)라는 이름도 있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Lake St. Clair는 약 430 square miles 정도 크기의 미시간의 다른 호수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호수이고 깊이가 11 feet(약 3미터 30센티) 정도 되는데 디트로이트 강으로 흘러내려간다. 우리는 과거 Grand Pacific House라 불리는 작은 지역 박물관에 들어갔다. 1881년에 Frederick Losh라는 사람이 지었고 살롱과 호텔로 사용되다 1927년에 1층은 철물점, 이층은 살림집으로 사용되다가 1986년에 역사 지역사회가 사들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한다. 1층에는 부엌에는 과거 냉장고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얼음통(ice box와 유사하다)과 간단한 과거 전시용품을 전시하는 전시실이 있었다. 거기에는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시 사용되었던 가스 마스크와 식량 배급일지, 훈장, 식량을 담았던 용기가 있었다.
보통 지역 역사박물관은 사람들의 기증한 물건으로 채워지는 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참전용사나 그 가족이 기증한 것 같았다. 보통 참전용사들은 전쟁 참여 후 크고 작은 훈장을 받아 전시하고 보관하고 있다가 사회에 기증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군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연예인들이 받는 트로피와 훈장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의미를 가질까를 생각해 보았다. 가족에게는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명예일 것이고 사회에는 역사의 한 시대를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난 정말로 물욕도 명예욕도 별로 없어 어떨 때는 내가 왜 이럴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직 세상에서 멀어져서 살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19세기 한국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갑신정변, 러일전쟁등 외국의 세력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려고 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 시기의 미국의 생활은 한국의 생활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미 미국은 진보된 기술과 발명으로 부를 누리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한국과 미국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얼마나 빨리 발전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좁은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가니 과거 침실이 6개 정도고 부엌과 다이닝 룸이 자리잡고 있다. 호텔이라 부르기에는 좀 작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가구와 소품들이 방마다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이들 소품들은 기증받은 것들인데 너무(?) 많아 보였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인형들이 놓여있어 마치 '인형의 집'을 방불케 했다.
나의 관심을 이끌었던 소품중하나는 '에디슨의 축음기'였다. 에디슨은 1878년에 축음기를 발명했는 데 모양이 에디슨의 축음기와 좀 다르다. 찾아보니 1910년대에 만든 Model No. C150 oak case로서 지금은 골동품으로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아직도 팔리고 있었다. 선명하게 박힌 에디슨의 축음기를 보며 초등학생시절 교과서에서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를 공부했던 적이 있는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미국에 와서 진짜 에디슨의 축음기를 보다니....
또 다른 것중하나가 '재봉틀'이다. 과거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집에 거의 재봉틀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엄마도 'singer'라고 불리는 재봉틀로 나와 여동생옷을 만들어 주시고 웬만한 것을 거의 집에서 손수 만드셨던 것을 기역 한다. 나는 가정시간에 재봉틀 하는 법을 배웠지만 내 평생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 대신 난 재봉틀 다리 위에 유리판을 깔아 장식품을 올려놓는 테이블로 사용했었다. 남편의 동생은 폴란드로 이주하며 본인 할머니가 쓰시던 정말 낡은 재봉틀을 배로 다른 짐과 함께 가져갔다.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오래된 문화와 가족의 낡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다루는 점은 배울만하나 나는 물건에 치어서 사는 것은 딱 질색이다. 나의 남편도 pack rat(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사람)이라서 나와 옥신각신 할 때가 많다. 아무튼 정말로 나를 잠시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게 만든 소품이었다.
그 옆에는 낡은 피아노가 놓여있다. 내가 어릴 때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다. 학생들 가정형편조사에서 TV, 냉장고, 피아노, 전화등은 몇 안 되는 고가품 중 하나였다. 나의 부모님은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우리에게 피아노를 사주시고 레슨을 받게 해 주셨다. 이런 향수를 미국에 와서 느끼다니....
돌아 나오는 길에 옆집 이웃을 만났다. 대가족이 모여 따뜻한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난 그녀가 부러웠다. 나의 가족도 여기 있으면 같이 많고 많은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있는 데 말이다. 한국에 가면 가끔 이여유를 찾을 수 없다. 모두의 생활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기도 하고 모든 가족이 모여 큰돈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는 장소도 그리 찾기 쉽지 않다. 이번에 한번 시도해 볼 수 있을까?





